방송     2월 14일 큐티설교(요한복음11장38절에서44절)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2월 14일 큐티설교(요한복음11장38절에서44절)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금요일] 2월 14일 큐티설교(요한복음11장38절에서44절)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2020-02-16 11:21:14
정지원
조회수   1229
설교일 2020-02-14

오늘 본문에서는 드디어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살아날 것을 기대하며 기쁨으로 가야하는데, 무덤에 가시면서 예수님이 비통해 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유대인들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면서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느냐는 말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비통하다는 말은 슬퍼하다와는 다른 뜻입니다.

헬라어로 엠브리마오마이라는 단어인데 화내서 씩씩 거리다, 분개하다, 억울함으로 한숨 짓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앞서 35절에 예수님이 흘린 눈물과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35절에서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며 공감하는 눈물이라면 38절에서의 비통함은 사람들의 분노에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감정에 따라 그분의 마음 상태도 다르게 보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눈물을 흘리시고 비통해 하십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죽고 살리는 문제를 두고 감정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에게로 가는 과정 중에 만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감입니다.

 

우리는 목적을 향해 달려가면서 때로는 주변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혹은 주변의 상황들이 목적을 향해 가는데 방해가 된다면 일부러 무시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보를 보면 항상 주변을 살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갈 때에도 혈루병 걸린 여인과 대화를 하십니다.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도 계속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예수님의 입장에서 나사로는 이미 살아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슬퍼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모르고 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결정하시는 순간 그는 이미 살아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관심은 나사로에게 있지 않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여정에 그 마음을 슬프게도 할 수 있고, 비통하게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삶이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도 할 수 있고, 혹은 슬프게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을 기대하며 기뻐하심으로 가야할 그 걸음을 사람들의 감정에 의해 비통해 하며 걸어가셨습니다.

 

무덤에 이르러 보니 이미 무덤은 돌로 막아 두었고 무덤에서는 이미 시체 썩은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을 치우라고 명하자 마르다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녀의 상식에서 이미 나사로는 죽은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정말 죽은 것입니까?

모릅니다.

무덤의 문이 닫혀 있고 냄새가 나는 현상으로 그녀는 나사로를 죽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맥박이 뛰지 않고 그가 전혀 숨을 쉬지 않는 그 모습을 보기 전에는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냄새 하나 만으로 나사로의 죽음을 확정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대로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경험에 의한 생각을 기준으로 맞고 안 맞고를 따집니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고 이야기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에도 반대하며 내 생각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내 판단에 크게 반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만나러 가는 길에 어떤 기분을 가지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무덤을 열라고 하셨을까요?

그의 썩어가는 시체라도 봐야 직성에 풀리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한계짓는 마르다의 생각의 한계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40절의 말씀입니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이 말씀은 4절에 나사로의 병 때문에 처음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에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 때에는 나사로가 죽지 않았습니다.

단지 병에 걸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 희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 정도는 치유할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판단과 믿음의 한계로 예수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사로를 만나러 가는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일까요?

고통 중에 죽었을 나사로를 생각하며 슬프셨을까요?

아니면 다시 살아날 나사로를 기대하며 기뻐하셨을까요?

 

우리의 시선의 집중이 본문에서 어디를 향해야 합니까?

무덤을 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사람들을 향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왜 기도하셨습니까?

 

41, 42절의 말씀입니다.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께서 항상 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인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제가 굳이 지금 이 무덤 앞에서 기도 하지 않아도 아버지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기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시선을 무덤에서부터 본인에게로 옮겨오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본질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본질은, 나의 문제와 나의 고통과 나의 질병에 눈을 두지 않고 예수님께로 눈을 두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고 문제가 발생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눈을 돌릴 때에,

예수님의 선포의 말씀이 들립니다.

작은 소리도 아닌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에만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믿음이라는 것이 더욱 깊어지는 사건입니다.

병들었을 때, 죽었을 때, 그들의 시선은 달라졌습니다.

45절에서 이 일을 본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어느 상황에서도 한결 같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시간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염려는 끊이지 않습니다.

고통은 상상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상실감, 거절감, 낙심, 허탈함 이 모든 감정들이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 예수님 비통해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감정에서 벗어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내 생각과 판단으로 사건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 속에서도 주만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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