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2월 21일 큐티설교(요한복음 13장 12-20절) 낮아짐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2월 21일 큐티설교(요한복음 13장 12-20절) 낮아짐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금요일] 2월 21일 큐티설교(요한복음 13장 12-20절) 낮아짐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2020-02-22 09:53:21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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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2020-02-21

요한복음 1312-20절 낮아짐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일입니다.

어제 설교에서도 얘기했듯이 발을 씻겨주는 것은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은 나는 너희들의 노예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하는 예수님의 이 모습은 제자들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스승이라면 제자들에게 군림하며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나는 너희들의 노예, 종임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가막힌 상황이 마무리가 되고,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 13절 말씀입니다.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주인이요, 선생인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이 혁명적인 일을 왜 하셨을까요?

 

그것은 주인이며 선생이지만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고 종이 되어 섬겼던 것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나처럼 섬기는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스승이 한 것을 보고 경험한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스승이 한 행동을 따라하는 자가 제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인습, 관습, 문화, 전통 등 모든 것을 깨어 부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이 어린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사장으로서 누려야 할 특권이 있지만 부하 직원들에게 그 특권을 남용하지 않고 섬겨야 합니다.

자녀들보다 부모의 말이 더 합리적이며 경험적으로도 더 유익할 수 있지만 자녀들의 말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있음을 알고 나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교회에 기득권이 있지만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내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갈 때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허리를 숙일 때, 무릎을 꿇을 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성육신하셔서 인류의 대속물이 되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이 누가 큰 사람인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지에 관한 문제로 싸웁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고, 다른 사람을 부리는 것이 목표가 되는 사람은 결코 성육신하셔서 인류의 대속물이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높은 곳을 향해, 위해를 향해 언제나 고개를 쳐들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는 결코 낮은 곳에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나의 자리와 위치를 모두 내려놓고 성육신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향유 부은 여인 더 드리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그 이전 수많은 이적과 가르침을 통해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자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과 기득권에 위협이 다가 오자 한 사람이 죽어 많은 사람이 유익하다면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합니다.

섬김과 낮아짐이 아닌 언제나 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은 결코 예수님의 이 섬김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요한복음 12장에 향유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의 생명인 향유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깨어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종이요, 노예임을 자신의 생명인 향유를 깨어 예수님의 발에 부음으로,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의 행한 일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여인이 받은 복은 어마합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향유부은 여인의 이름인 마리아와 그가 한 행동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이 실제적으로 누리지 못한 복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살아있는 동안 누린 복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대속제물이 대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가장 낮은 곳인 발을 씻기 위해 자신의 머리와 무릎 심지어 머리까지 숙여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모두 예수님의 얼굴과 손의 생김새는 알지만 예수님의 발은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 여인만이 알고 있습니다.

다 닳은 샌들을 신고, 뒷꿈치에 박힌 굳은 살, 발가락 사이사이 묻은 먼지, 땀과 디범벅이 되어 냄새는 발 등 온 인류를 위해 예수님이 어떻게 공생애를 걸어오셨는지, 이 여인만이 온전히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완전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지만

자신의 생명까지,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셔야 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더 주고 싶어도 더 줄 수 없는 안타까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직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며, 무릎을 꿇는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언어의 온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할머니와 손자가 병원에 갔다 오는 길인지 할머니 손에 약 봉지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손자 이마에 손을 올려보더니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직 열이 있네. 저녁 먹고 약 먹자.”

손자가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대꾸했습니다.

. 그럴께요.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순간 저자는 할머니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의 유형을 몇 가지 예상해 보았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할머니는 다 알지

그런데 할머니가 대답한 말은 전혀 달랐습니다.

손자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은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압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남보다 재빨리 알아챕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깁니다.

그리고 아파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충일교회 성도님들.

우리가 이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여나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부와 권력을 갖기 위해, 내가 가진 특권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성육신하셔서 온 인류의 대속제물이 대신 예수님의 마음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향유 부은 여인이 그러한 것처럼,

낮아지고, 섬기며 나아갈 때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갈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며, 무릎을 꿇을 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생명과 살과 피를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내가 더 낮아지겠습니다. 내가 더 섬기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나는 당신의 노예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낮아짐, 섬김의 모습을 본 받을 때 주시는 것

두 번째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 전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31절 말씀입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이란 먼저 예수님이 택하신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그 제자 중에는 배신의 상징인 가룟 유다도 있습니다.

그리고 결코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 베드로와 동일한 고백을 한 제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고 나서 어린 계집종의 말 한 마디에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하며 부인하였습니다.

누가 나를 팔지, 누가 나를 부인할지 다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을 직접 씻어 줌으로 인해 나는 너희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섬길 것임을 온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 발을 씻긴다는 것은 너희들은 나를 배반하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욕한다 할지라도 나는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아, 너희들을 끝까지 사랑해라는 예수님의 의지요 선언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 또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이 섬김의 모습을 본받을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이로 딸 - 사랑은 믿음을 낳는다!

마가복음 5장에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기 전 야이로의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이미 죽었는데, 잔다고 말하니 그렇게 말하는 예수라는 사람은 바보요, 멍청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코 비웃지 않고 그 말을 그대로 믿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죽은 딸의 아버지 야이로입니다.

이미 죽었다 할지라도 믿기만 하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살아나야 할 사랑하는 나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능력을 믿은 사람은 야이로 뿐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야이로와 그 딸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이로는 죽은 나의 딸은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기에 모두 다 죽었다 할지라도 옷깃에 손을 댄 혈루증 여인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의 그 능력이라면 반드시 죽은 나의 딸을 살려낼 것이라는 믿음이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믿음을 낳습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다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을 낳습니다.

 

전에도 한 번 얘기한 것 같습니다.

저의 친구들, 신학교 동기들은 제가 결혼을 못할 줄 알았거나, 제가 결혼을 하더라도 가장 늦게 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동기들 중에 제가 제일 먼저 결혼을 했습니다.

그들은 저의 지금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놀라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저의 어머니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예지력을 가지고 계셔서 일까요?

아닙니다. 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냥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소망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희망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포기하지 않음이 들어 있습니다.

 

저를 사랑하니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저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저를 사랑하니 기도할 때마다 저의 삶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봅니다.

그러니 더 기도할 수밖에 없고, 그러니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충일교회를 포기할 수 없다!

46년 전 충일교회가 효성교회에서 개척하였을 때, ‘효성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얼마 되지 않는 성도로 무엇을 하느냐?’라고 비웃은 사람들도 주변에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건축한다고 얘기했을 때, ‘성도도 적고 재정도 없으면서 건축은 무슨 건축이냐며 그냥 살던 곳에서 살어라고 비아냥 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웃거나 비아냥 댈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일까요?

새벽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들입니다.

충일교회와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여러분들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희망과 절대 포기할 수 없음을 낳습니다.

 

이 모든 마음은 결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육신 하시고 낮아져 제자들의 발을 닦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 또한 철저히 낮아지고 낮아져, 겸손히 섬길 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충일교회 성도님들.

여러분들이 비웃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남편, 자녀, 혹여나 우리 충일교회, 우리 성도님들을 볼 때 속으로 비웃거나 비아냥대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늘 영광포기하시고 가장 낮은 곳으로 성육신 하시고, 스승이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을 때,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웃음이나 비아냥이 아니라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라도, 심지어 배반하고, 배신하고, 나를 욕한다 할지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믿음, 소망, 희망, 포기하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가 그런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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