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2월 22일 큐티설교(요한복음 13장 21-30절) 최후의 만찬
2월 22일 큐티설교(요한복음 13장 21-30절) 최후의 만찬설교일 | 2020-0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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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는 완전한 연기자이자 위선자입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자기의 위선을 감쪽같이 속인 거예요. 만약에 다른 제자들이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그가 배반할 것을 알았더라면 그날 밤 그는 살아 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그 어떤 제자가 가증스러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그를 내버려 두겠어요. 그냥 죽이고 말겠죠.
베드로만 봐도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예수님 곁에 앉아 있는 요한에게 배신자가 누구인지 예수님한테 물어보라고 몸짓을 하잖아요. 그 자리에서 즉시 배신자를 처리할 심산이었어요. 그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실제로 칼을 차고 있었거든요. 그 칼로 나중에 예수님 잡으러 온 사람을 내려치잖아요.
어쩌면 그런 것들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가 더 성자처럼 행동했을지 몰라요. 그러면서 속으로는 마귀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그렇게 유다는 여러 가지 행동으로 위장한 채 여러 사람을 속였습니다. 그는 실로 아주 낯이 두꺼운 사람이었어요. 아주 여러 가지 면에서 능수능란한 위선자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제자들 속에서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고 자기의 계획을 아주 치밀하게 하나씩 하나씩 진행해 나갔어요.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경고의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외적인 행동만 보고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들은 언제든지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3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열두 제자 중 갸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 공동체 안에도 얼마든지 암적인 가라지와 같은 존재가 자라고 있다고 하는 경각심을 일깨워 줍니다. 역사만 봐도 자기를 위장해서 신앙 공동체를 해쳐왔던 인물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까지 속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훤히 다 알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호소하신 겁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똑바로 보라는 거예요. 그러라고 유다에 대한 호소를 여러 번 반복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는 거기에 좌석 순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유월절에는 유대인들이 하는 식사 관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식탁에 기대어 식사하는 거예요. 똑바로 앉아서 식사하는 게 아니라 유월절에는 오른쪽 사람에 기댄 채 식사했습니다. 그들 앞에 놓인 그 식탁은 낮고 단단한 통나무였어요. 그리고 그 둘레에 긴 의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U자형 모양이고 그중에서 영예 있는 자리는, 즉 주빈의 자리는 중앙에 위치한 자리였습니다. 그들은 왼쪽 팔꿈치를 식탁에 대고 왼쪽에 기대어 오른손을 사용해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리에 앉게 되면 왼쪽에 있는 사람의 가슴에 자연스럽게 머리가 놓일 수 있었어요. 아마 그날도 예수님은 그 낮은 식탁의 중앙에, 즉 주빈의 자리에 앉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사랑받던 제자 요한은 예수님 오른편에 앉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 품에 의지하고 있다고 성경이 기록해 놓기 때문입니다. 흥미롭죠. 그런데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그건 가룟 유다의 위치에요. 여러분, 그가 어디 앉아 있었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팔아버린 유다는요. 예수님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넘나들지 못하고, 예수님과 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위치해 있었어요. 어딥니까? 딱 한 곳, 예수님 왼편에 있는 자리였어요. 예수님의 머리가 지금 유다 가슴에 놓여져 있는 겁니다. 여러분, 유다가 앉은 그 자리 말이에요.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주빈은 자기와 절친한 사람들을 좌우에 앉혔어요.
그리고 그중에서도 왼편 좌석은 가장 영예로운 사람이 앉는 자리였어요. 가장 친한 친구가 앉는 자리였습니다. 바로 그런 자리에 지금 유다가 앉아 있는 거예요. 아마 이랬을 겁니다. “유다야, 내 곁에 와서 앉아라. 내가 너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다” 뭐 그러면서 유다를 자기 옆에 앉게 하셨을 거예요.
여러분, 바로 그런 자리에 예수님이 유다를 초대했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 호의가 베풀어졌다는 뜻 아닐까요? 그런데 거기에 또 다른 의미가 더 있어요. 주빈이 손님에게 음식을 떼어줬다는 건 아주 특별한 우정의 표시를 그에게 보여주었다는 거예요. 한 조각의 음식을 유다에게 떼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그에게 아주 특별한 총애를 표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지금 유다를 제일 신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유다는 예수님께 특별한 총애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무런 소용 없었어요. 아무리 여러 번 호소해도 그는 그냥 지나치고 말았어요. 그래서 결국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계속해서 유다를 향한 사랑을 표하셨어요. 그렇게 거듭해서 그를 구원하려고 하셨어요.
그러다가 결정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건 패배의 순간을 용납하신 거예요. 주님은 말씀합니다. 유다야, 네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무슨 말입니까? 머뭇거릴 때가 아니라는 거예요. 어찌하여 시간을 허비하고 있냐는 거예요. 고조되어 가는 이 긴장 속에서 어찌하여 쓸데없는 것에 마음을 쓰고 있냐는 거예요. 하기로 했으면 곧 행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제자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명절을 대비하기 위해 유다를 심부름 보낸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 당시 유월절이 되면 물질 있는 자가 물질 없는 자에게 물질을 나눠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이 유다를 보내서 가난한 자들을 도우려고 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어요.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기 위해 나간 거라고 생각 하지 못했어요. 그런 기대와 달리 일은 잘못되어 갔죠. 예수님이 유다에게 한 조각 음식을 주었을 때 그는 완전히 마귀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음과 동시에 그는 자신을 완전히 마귀에게 넘겨주고 말아요.
여러분, 마귀는 언제나 아름다운 것을 취하여 그것이 지옥의 사자가 될 때까지 아주 철저하게 왜곡시켜 버립니다. 그는 사랑을 취하여 욕망으로 바꾸고 거룩한 것을 취하여 교만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애정을 취하여 자기만족으로 바꿔 버려요. 우리는 이 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 마귀의 뜻대로 쓰이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점검해 봐야돼요.
이런 과정 속에 유다가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때가 밤이었어요. 우리는 요한이 말하고 있는 방식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매우 함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요. 여러분, 일반적으로 해가 저물었다고 하는 건 밤을 의미하죠. 그런데 거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뭐죠? 그건 우리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 말씀해 주고 있다는 거예요. 유다는 그 당시 사단의 지배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밤이었어요.
이처럼 사람이 그리스도를 떠나 자신의 길을 걸어갈 때는 언제나 밤입니다. 선한 소명에 응하지 않고 악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 때는 언제나 밤이에요. 미움이 사랑의 등불을 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밤이에요. 그런데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 어떻게 되죠? 빛 가운데로 걸어가죠. 그리고 그 반대로 등을 돌리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뒤로 하고 유다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로부터 등을 돌린고는 파멸의 길로 걸어갔어요. 이는 ‘주사위가 던져졌다’고 하는 줄리어스 시저의 말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접어든 거예요. 양들이 도축장에서 내릴 때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곳이 불길한 곳임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위험을 알리는 무슨 낌새를 맡거나 감지하는 것이죠. 그래서 양들은 도축장에 도착하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도살장 주인들이 방법을 고안해 낸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도축장에 익숙해져 버린 양 한 마리를 그 안에 집어넣고 맨 앞에 세워두는 겁니다. 그는 더이상 도축장을 위험한 곳으로 감지하지 않아요. 그리고 양들은요.
맨 앞에 있는 양을 따라 가요. 그렇게 그를 따라 도축장으로 끌려들어 가는 겁니다. 도축업자들은 그 양을 일컬어 유다라고 불러요. 여러분, 우리는 그런 양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중에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아마 이 가운데 모르는 분이 안 계실 거예요.
바로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한 명화입니다. 그가 그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한 제자의 모습을 다 그릴 수 있었다 그래요. 그런데 누구의 모습은 그리지 못한 겁니까? 예수님과 가룟 유다의 얼굴은 그리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다 빈치는 그 두 명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 모델이 되어줄 사람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것도 몇 해씩이나.
그러던 어느 날 이태리에 한 촌구석에 들어가게 돼요. 그리고 거기에 있는 성당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그건 무릎 꿇고 기도하는 청년의 얼굴이었어요. 그 얼굴이 마치 예수님의 얼굴로 보였던 겁니다. 그래서 그 작품 속에 청년의 얼굴을 예수님의 얼굴로 그려 놓게 돼요. 그런데 문제는 뭐죠?
아직 유다의 얼굴은 찾지 못한 거예요. 그는 아직 유다의 얼굴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그 일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유다의 얼굴을 찾기 위해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참을 돌아다녔어요. 그렇게 또 몇 해가 흘러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 뒷골목에 있는 한 술집에서 술에 취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마치 유다처럼 보였어요.
유다의 추악한 얼굴과 증오로 번득이는 눈, 바로 그 모습이 유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불러다가 모델료를 지불하고 그림을 그리는 데 뭔가 이상한 거예요. 그러다가 잠시 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그가 찾은 그 사람은 바로 몇 해 전, 예수님의 인자한 얼굴로 기도하던 그 청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자한 얼굴로 기도하던 그 청년이 몇 년도 안 된 사이에 그만 가룟 유다의 얼굴을 한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만 거예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그는 회계를 맡아볼 정도로 아주 총망 받던 사람이었어요. 그러던 그가 변해버리고 만 겁니다.
그의 종말은 그야말로 죄의 어둠으로 가득 찬 배신으로 끝나고 말았어요. 어쩌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과신하고 있는지 몰라요. 여러분, 지금도 우리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집어삼키기 위해 그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 점을 놓쳐선 안 돼요. 그러면 유다처럼 되는 겁니다. 우리는 더욱 겸손히 주님을 의지해야 돼요.
유다의 삶은 우리도 얼마든지 사단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이런 유다의 배신을 보며 우리는 어떤 유혹이나 반대를 만나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하는 결심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 앞에는 빛의 길과 흑암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운데 어디로 걸어가시렵니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그 사랑의 호소에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돼요. 옳을 잃은 선택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어둠 가운데 길을 잃을 수 있는 아주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돼요. 그렇게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번호 | 분류 | 제목 | 작성자 | 설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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