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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일 큐티설교(시편 140편 1-13절) 비방의 소리조차 들어주시는 주님
설교일 | 2019-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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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강포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라고 기도했는데 성도 된 우리도 이와 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는 것이죠. 여러분은 악한 자들로 인해 이유 없이 고통당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다윗은 이 시를 통해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구해주기를 간구 한 거예요. 왜냐하면 악인들이 다윗을 향해 악을 꾀하고 독사의 독을 품고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그를 건지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어요. 여러분, 그가 도움을 구한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세상의 죄악과 악인들로 인해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크고 강력한 것들이에요. 여러분은 그것들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십니까?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잘하고 계신 겁니다. 세상의 풍조와 악인의 횡포 속에 우리를 보호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믿으셔야 해요. 그분이 우리를 악인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하나님께 맡기시나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인은 시인을 해하려고 하는 모든 자를 일컫습니다. 그런데 따져 보면 여기 나오는 악인이 정확히 누구인가 하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본 시의 교훈은 악에 대하여, 그리고 시험에 대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안위를 구하고 사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악인의 손과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 굉장히 강한 것 같고 또 아무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하나님 도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에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죄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에 맞설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겁니다.
그렇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가 바로 성도들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어요. 때때로 우리는 이 시의 기자처럼 자기를 괴롭히는 적에 대해 분노와 억울함을 버리지 못해 적개심으로 가득 찬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이 시는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해요. 그래도 괜찮다 그래요.
우리는 사실 너무나 억울하기 때문에 나는 살아야 되고 다른 사람은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도를 할 때가 있어요. 여기서 적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한편으론 사회구조죠. 이렇게 고난에 처하면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에 대해 분노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자하심은 돌아보지 않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일을 그르쳐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모든 분노와 적에 대한 고발과 불행을 우리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하나님은 분노에 찬 입을 닫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세요. 그때가 언제든지 고난에 처한 사람들 편이 되어주시는 겁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분노의 외침과 적을 향한 저주를 들어주시는 거예요. 무작정 적을 축복하라고 그렇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쏟아내는 모든 탄원을 다 들어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쉽게 판단하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들어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쉽게 충고하고 훈계해도 들어주시는 거예요. 삶의 고난이 너무 심하다고 느껴지면 우리의 모든 탄원을 다 들어주시는 겁니다.
어떤 방식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다시 마음 다잡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아시기 때문이에요. 그런 과정 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 역시 그랬어요.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저의 잘잘못을 따져 묻지 않은 거죠. 제가 호주에서 사역할 중고등부를 담당했습니다.
그들 안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한국말을 써서 그런지 그들을 대할 때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사역하던 대로 사역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로 말이죠.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저만 생각했지, 아이들의 정서가 어떤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겁니다. 그들 안에 분명 호주라는 정서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요. 여러분, 사역하다 보면 누군가의 잘못을 짚어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역자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큰일이 되기도 하고 별일이 아니게 되기도 해요. 오해가 풀리기도 하고 쌓이기도 합니다. 상처가 아물기도 하고 덧나기도 해요. 그래서 누군가의 잘못을 따져 물을 때는 굉장히 조심하고 또 신중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한 번 내뱉는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겁니다.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되는 거예요. 뚫린 입이라고 다 성질대로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어려운 게 잠깐이라도 정신 줄을 놓으면 자기 편한 대로 하고 만다는 것이죠. 가만히 놔두면 자기 편한 데로 가게 돼 있습니다. 익숙한 데로 가게 돼 있어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제가 그때 영어학원에 다녔거든요. 그래서 웬만하면 아이들하고 소통할 때 영어를 쓰려고 했어요. 안 되는 영어 가지고 막 부대낀 거죠. 물론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또 저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문제가 또 거기에서 일어나더라고요. 실제로 쓰이는 영어의 뉘앙스를 다 파악하지 못하고 쓰다 보니까 문제가 일어난 겁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말이니까, 좋은 표현이니까, 영어사전에 좋은 의미로 나와 있으니까 썼던 말들이 아이들에게 다른 의미로 전달 되는 경우가 있었어요. 어떨 때는 제가 하는 말들이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영어를 배우는 입장이다 보니까 그런 일이 생기더라고요.
물론 이걸 좋게 보면 교역자가 어설픈 영어 써서 생긴 일로 넘어갈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아이들이 받은 상처가 너무 큰 거예요. 상처 줄 마음이 요만큼도 없었는데 상처를 주게 되었어요. 여러분, 이럴 때 어떡하면 좋습니까? 제 딴에는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변명을 늘어놓게 되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사그러들지 않고 더 커지더라고요. 그때 얼마나 우울하고 외로웠는지 몰라요.
다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완전히 죄인 된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나만 잘못했나, 자기들은 잘못한 게 없나? 그리고 내가 죄를 지었으면 또 얼마나 지었다고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다른 사람이 다 적으로 보여요.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도 다 적이 돼 버립니다. 적이 아닌데, 적으로 자꾸 의식되는 거예요.
싸워서 이겨야 되는 적. 여러분 각자에게도 이런 적이 있을 겁니다.
적이 아닌데 적이 돼 버린 사람들, 나도 모르게 적으로 여기고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 선의로 시작했다가 악만 남게 되는. 여러분, 만약에 이런 마음이라고 한다면 기도가 잘 되겠습니까? 다 푸념이고 한탄이겠죠. 하소연이겠죠. 하나님, 저 정말 억울합니다. 분하고 답답합니다. 제 딴에는 다 잘해보려고 한 일인데, 한다고 한 일인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되는 걸까요?
정말 잘하려고 한 일인데, 열심히 한 것뿐인데 왜 이래야 하죠? 이렇게 몇 날 며칠을 기도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순간이 와요. 저도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게 뭐였냐면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때 제가 깨달은 게 뭔지 아십니까? 그게 뭐냐면 정말 나에게 잘못한 게 없나 하는 뭐 그런 게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제 안에 나쁜 마음이 있었거든요. 다 적으로 여겼거든요. 악인의 언어습관을 경계해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거든요. 3절에서 시인은 악인은 뱀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거기 나오는 악인의 혀의 특징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날카롭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 치명적인 독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날카롭다는 말은 말하는 방식에 있어 상대방을 배려해서 완곡하게 부드러운 말을 쓰지 않고 자기 떠오른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내뱉는 말을 말합니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독이 있다는 말은 악의적인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저리게 하는 악담과 저주와 조롱과 비난의 말로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욕설이 우리의 문화고, 일상일 수 있어요. 그럼에도 이런 것들은 고쳐져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정말이지 날카로운 칼과 독사의 독과 같은 해악이 있어요. 이에 대해 야고보는 말하기를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난다고까지 했습니다.
여러분, 성도가 누구인가요? 성도는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는 위로의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해를 입혔다면 우리는 그만 거기에서 멈춰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바르고 정직한, 그리고 덕이 되고 위로 되는 말을 해야 됩니다. 유익이 되는 말과 아름다운 말로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 돼요.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잘잘못을 따지지 않으세요. 어리석은 기도라고 해도 그 기도를 기도 자체로 받아주세요. 무작정 잘잘못을 따져 묻지 않고 상처받은 마음은 위로하고 싸매주십니다. 바로 그런 분이 우리 하나님이에요. 네가 어쨌네, 저 쨌네, 그렇게 따져 묻지 않으세요. 그 무엇보다 위로해 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 기도가 거기서 그치면 안 돼요.
푸념하고 한탄하는 기도가 주님의 뜻을 발견하는 기도로, 하소연하는 기도가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 하는 기도로 바뀌어야 돼요. 다윗은 그렇게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하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라옵기는 우리의 어떠한 기도라도 개의치 않고 다 들어주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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