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12월 29일 큐티설교(시편 148편 1~ 14절) 온 천하 만물 우러러

12월 29일 큐티설교(시편 148편 1~ 14절) 온 천하 만물 우러러
[주일] 12월 29일 큐티설교(시편 148편 1~ 14절) 온 천하 만물 우러러
2019-12-29 07:35:29
이한솔
조회수   1480
설교일 2019-12-29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48편은 시편을 마감하는 다섯 편의 시편 가운데 세 번째 시편입니다. 이 시편 역시 다른 편들처럼 주를 찬양하라, 즉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할렐루야로 끝나는 할렐루야 시편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계속해서 할렐루야가 반복되고 있어요. 이 시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과 모든 이라는 단어가 10번 나오는데 성경에서 십은 전체와 완전을 상징합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 148편은 찬양의 주체나 횟수가 완전하고 영원하다는 거예요. 개인과 공동체의 찬양 너머 창조자에게 드릴 창조 세계의 찬양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 시편이 기록된 의도에요. 오늘 본문은 모든 피조물이 주님을 찬양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생명 있는 피조물과 생명 없는 피조물, 그리고 이성 있는 피조물과 이성 없는 피조물이 그 대상입니다.

 

그리고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연관성을 아주 포괄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 세계를 창조하고 지켜주신 분에게 영광 돌리는 일은 생명 있는 피조물과 생명 없는 피조물을 연결시켜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온 세계가 결합 된다는 거예요. 여기에 찬양의 목적이 있습니다. 온 세계를 향한 그 거대한 비전이 이 시 안에 담겨 있어요.

 

그래서 인생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은 찬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는 이 요청은 오늘 본문에 따르면 하늘에서부터 출발하여 땅으로 내려갔고 또 인류에게로 방향을 바꾼 후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 끝을 맺습니다. 이 공동체의 한 가운데 주님은 찬양의 원인이요 주제가 되십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초청받는 대상은 하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의 하늘, 하늘 위에 있는 물들, 해와 달과 밝은 별, 그리고 모든 천사와 모든 군대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초청 받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께 지음 받았기 때문이에요. 여호와가 모든 것의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땅에 있는 것들이 찬양하라고 초청 받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본질적인 영광과 백성의 독특한 위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7~10절까지는 사람을 제외한 것들, 즉 용들, 바다, , 우박, , 안개, 광풍, 산들, 과수와 모든 백향목, 짐승, 모든 가축, 기는 것, 그리고 나는 새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초청 받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해와 달과 하늘과 바다와 광풍과 산들과 동물과 새들이 그 찬양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들은 어떻게 찬양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걸까요?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시적인 표현으로 생각해서 접어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이 찬송 뒤에 깔려 있는 신학적인 진지함을 놓치게 되요. 그들이 어떻게 주님을 찬양하는가?

 

그 답은 5절과 6절 말씀에 깔려 있습니다. 그것들이 여호와를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아멘.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적 명령을 발하셨을 때 세상은 무에서 유의 상태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천체들의 빛과 궁창과 바다가 모두 주의 명령으로 만들어졌고 그 주의 능력에 의해 그 위치와 의미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광풍은 광풍 됨을 인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하고 있는데 외관상으로 볼 때 그것은 어떤 통제도 받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광풍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거예요.

 

맹렬하고 무법하고 포악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명령과 그 계획을 광풍이 얼마나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몰라요. 그 행동 자체가 다 하나님의 위엄과 그 능력을 선언하는 찬양 행위라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들의 피조물 됨 그 자체로 주의 목적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도저히 길들일 수 없는 그 자연들은 그렇게 그분의 강한 뜻을 이루는 도구로그분의 초월성을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거친 땅과 나무와 모든 동물은 주님의 예술적 기교를 증거 해 주고 또 그들의 건축자가 그들에게 얼마나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 명령에 따라 존재하게 되었고 또 그 명령에 따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의 수명은 하나님 의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창조의 질서를 두시므로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정하시고는 그것을 지킬 법칙을 주셨습니다. 창조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움직이는 법을 정하신 거예요.

 

그렇게 모든 피조물에 주님은 고유한 특징과 행위의 한계를 설정하시고 그 위치를 유지하도록 엄격한 질서를 두셨습니다.

모든 존재에 규칙적인 질서를 부여하셨어요. 피조물 하나하나에 고정된 법칙을 정하여 그 정해진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게, 그것을 강제로 준수할 수밖에 없도록 일련의 법칙을 정하신 겁니다. 그렇게 주님은 주권자로서 말씀의 권위와 능력으로 모든 것을 지으시고 그 의도에 따라 정돈하셨어요. 이처럼 오직 주님만이 모든 것을 조정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그 질서는 그래서 누구도 폐할 수 없어요. 아주 절대적인 질서입니다. 여러분, 이 시편이 말하는 창조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며 그 위치와 목적에 따라 모든 것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피조 된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 그게 바로 자연이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방법입니다. 이게 바로 그들이 찬양하는 방식이에요.

 

하나님의 창조 질서대로 있는 곳에서 자연의 순환 질서를 지키는 겁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과 영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을 찬양하고 선포하고 있어요. 예술가의 작품이 그에게 영광을 안겨 주듯이 창조된 세계는 여호와의 능력을 반영함으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은 여호와가 그들에게 할당해준 그 기능을 완수함으로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자연의 찬양은 모든 것을 발생시킨 창조주 여호와가 모든 것을 유지하고 통제한다는 그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1~12절에서는 사람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는 데 초청 받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역시 피조물의 일부라는 거예요.

 

우리 역시 다른 피조물처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법을 집행하는 재판관이라고 해서 빠질 수 없어요. 그들 역시 땅 위에 존재하는 피조물입니다. 피조 된 인간이에요. 아무리 영특하고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인간은 그저 피조물일 뿐입니다. 아무리 큰 권위를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무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요.

 

아무리 잘 나고 돈이 많아도 예외일 수 없다고요. 인생을 정리하는 노인이나 인생을 시작하는 아이들 모두 그 연령에 맞게 열정과 경륜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헌신해야 돼요. 그렇게 모든 인간은 성역의 구분 없이, 성별의 차이 없이, 나이와 상관없이 찬양해야 합니다. 세상의 왕들로부터 모든 백성이 다 여호와를 찬양하는 거예요. 이렇게 시인은 모든 계층과 세대를 포함하여 찬양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아무런 조건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윤리성도 요구되지 않고 남녀의 구별도 없고 빈부의 차이도 없고 나이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지위와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여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겁니다. 제가 앞서 자연에게 주어진 찬양의 방식이 있다 그랬죠? 그처럼 인간에게도 주어진 찬양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평등하게 사는 것이에요. 우리는 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서로의 차별을 없애고자 애쓰고 자연의 질서와 생명을 존중하는, 즉 창조의 질서 안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방법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나 혼자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소리로 찬양해도 하나님의 사역과 자리에 미칠 수 없어요. 우리의 찬양이 하나님의 자리에 미치려면 우리 마음이 합해져야 돼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이름이 홀로 높임을 받고 그 위대하심이 하늘과 땅에 뛰어나신 바로 그분과의 관계에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를 신실하게 찬양함이 우리의 명예이자 권위입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는 주의 높으신 이름을 알고 말하는 유일한 피조물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특별한 지위와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특권을 가졌어요. 그렇게 우리는 주님께 친근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6절에 보면 언약적 은총에 따라 그의 백성은 주님과 함께 높은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우리는 다른 피조물이 받지 못한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위치와 목적도 찬양입니다.

 

우리 같은 주의 백성이 드리는 찬양을 통해서 온 우주의 진리이신 주의 이름이 다른 피조물을 대신해 선포되는 거예요. 여러분, 피조물은 절대적으로 창조주를 위해 존재합니다.

교만한 인간의 그릇된 독립 선언에 세뇌 된 지성인들은 기분 나쁘겠지만 사실이 그래요. 진리가 그렇다고요. 창조주를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바로 피조물의 가장 중요한 존재 목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비위를 맞춰야 하는 독재자라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시기까지 자비를 베풀어 주신 그런 분이죠.

 

그런 분을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 찬양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거룩하며 고귀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하고 아름답고 마땅하다 그랬어요.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 삶이 거룩하고 고귀해 질 수 있어요. 비천한 삶이라도 얼마든지 고귀하고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므로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뛰어나고 영광 받을 만한 면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찬양의 될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게 스스로를 찬양의 대상으로 착각하면 안 돼요. 그 모든 찬양과 칭송은 거절하고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찬양받기 합당한 분이라는 걸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피조물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요청하는 이 시는 여호와가 얼마나 찬양받기 합당한 분인지 표현하고 있어요. 창조주 하나님, 그 분을 찬양합시다. 우리 아버지를 찬양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의 내용이요, 소망이이요, 목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분류 제목 작성자 설교일
187 주일 12월 29일 큐티설교(시편 148편 1~ 14절) 온 천하 만물 우러러 이한솔 2019-12-29
186 주일 12월 15일 큐티설교(요한계시록 16장 10-21절) 최종 심판과 아마겟돈 이한솔 2019-12-15
185 주일 12월 8일 큐티설교(요한계시록12:1-17) 영적 전쟁 이한솔 2019-12-08
184 주일 12월 1일 큐티설교(계 7:1-17)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 이한솔 2019-12-01
183 주일 11월 24일 큐티설교(요한계시록 2장 8-17절) 환란은 견디고 잘못은 돌이키고 이한솔 2019-11-24
182 주일 11월 10일 큐티설교(시편 140편 1-13절) 비방의 소리조차 들어주시는 주님 이한솔 2019-11-10
181 주일 11월 3일 큐티설교(시편 135:1-21)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차광욱 2019-11-03
180 주일 10월 27일 큐티설교(유다서 1:17-25)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하라 강주헌 2019-10-27
179 주일 10월 13일 큐티설교(빌립보서 1:1-11) 복음의 동역자 강주헌 2019-10-13
178 주일 10월 6일 큐티설교(여호수아 21장 20-45절) 흩어진 레위인들이 받은 은혜 정지원 2019-10-06
177 주일 9월 15일 큐티설교(여호수아 8:30-35) 여호와를 위한 제단 차광욱 2019-09-15
176 주일 9월 8일 큐티설교(여호수아 5장 1-12절) 길갈에서의 순종 김태선 2019-09-08
175 주일 8월 25일 큐티설교(에스겔27:26-36) 두로의 교만함 김태선 2019-08-25
174 주일 8월 18일 큐티설교(에스겔 23장 22-35절) 어리석은 오홀리바 권도완 2019-08-18
173 주일 7월 28일 큐티설교(에스겔 12:17-28) 임박한 종말 권도완 2019-07-28
1 2 3 4 5 6 7 8 9 10 ... 13
전체 메뉴 보기
×